인물화 자화상(뮌터) - 1908~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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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 자화상(뮌터) - 1908~1909년
장르 초상화
작품사이즈
작가이름 가브리엘레 뮌터
연락처 010-7569-7338

가브리엘 뮌터(Gabriele Munter, 1877~1962년)는 독일 베를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표현주의 여류 화가이다. 그녀는 칸딘스키의 연인이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4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1897년 스무 살 때 뒤셀도르프 스튜디오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901년 뮌헨 여성화가협회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칸딘스키의 아방가르드 협회 팔랑스 미술학교를 비롯, 여러 곳에서 회화, 조각, 판화를 두루 배웠다. 뮌터는 독일 표현주의와 마티스의 야수파, 고갱과 반 고흐의 강열한 색채와 대담한 윤곽에 영향을 받았다. 

뮌터는 팔랑스 미술학교의 누드 드로잉 수업에서 추상미술의 선구자 칸딘스키를 만났다. 뮌터가 칸딘스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러시아에서 온 36세의 외국인, 게다가 유부남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여행을 같이 다녔고, 앙리 루소와 마티스 등을 만나며 파리에서 같이 살게 되고, 이후 독일 바바리아의 무르나우에 정착하게 된다. 

그들의 무르나우 집은 '러시아인의 집'으로 불리며 뮌헨 아방가르드의 아지트가 되었고, 이곳에서 프란츠 마르크, 폴 클레 등과 청기사파를 창립하게 된다. 이 시기는 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을 시도하고 있을 때로 청기사파 멤버들은 미술의 정신성을 강조하며, 프랑스의 비구상 미술뿐만 아니라 유럽의 중세 미술, 원시주의에 관심을 두었다. 이 그룹은 입체파, 야수파 미술을 추상미술로 진화시킨다. 

1차 세계대전으로 칸딘스키가 독일을 떠나게 되자 청기사파는 해산하게 되고, 뮌터와 칸딘스키도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다시 스웨덴에서 재회하고 잠시 같이 지내지만 서류상으로 결혼을 약속하며 이들은 다시 헤어진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그 약속을 저버리고 러시아 장군의 딸과 결혼하면서 변호사를 통해 뮌터가 보관하고 있던 칸딘스키의 작품을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뮌터는 칸딘스키와 헤어진 후 10여 년간 붓을 들지 않고 운둔 생활을 하다가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치 정부의 '퇴폐 미술' 탄압으로 인해 뮌처는 보관하고 있던 칸딘스키를 비롯 청기사 그룹 멤버들의 그림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뮌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마침내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1949년 뮌헨의 ‘청기사’ 전시회에서 그 위상을 보여주었다. 무르나우에 남겨진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들을 나치 통치 기간 동안 지켜낸 뮌터는 그 작품들과 자신의 그림을 1957년 80회 생일 때 뮌헨 렌바흐 하우스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는 1962년 85살의 나이로 무르나우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작품은 뮌터의 자화상이다. 이젤에 자신을 그린 렘브란트부터 반 고흐에 이르는 예술가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녀는 초상화 외에도 다수의 풍경화를 제작하였다.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뮌처의 그림은 마티스의 야수파 빈 샌트 반 고흐의 강력한 색채에 영향을 받았고, 이들은 재평가를 통해 세계적인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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